[시선뉴스 박진아 / 디자인 김미양] 품행이 나쁜 믿을 수 없는 학생, 의욕과 야심이 없고 다른 학생과 자주 다투던 아이,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고 야무지지 못한 학생. ‘그’의 생활 기록부에 적혀 있던 평가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영국에 그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만 10개가 넘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낙제생에서 먼 훗날 한 국가의 총리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기도 한 그 사람. 바로 ‘윈스턴 처칠’입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의욕과 야망이 없었고, 성적은 하위권인데다 상습적인 지각꾼이었던 처칠. 심지어 언어 장애와 무대 공포증까지 가지고 있었던 그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처칠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선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인데요. 처칠은 그 누구보다 ‘역사’ 과목에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역사에 강한 자신감을 보인 처칠은 역사를 공부하며 역사적으로 훌륭했던 사람들의 장점을 자신의 행동지침으로 삼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성적이 좋지 않던 처칠은 삼수 끝에 샌드 허스튼 사관학교에 입학됐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2시간 이상의 체력 훈련을 하고, 길을 걸을 때마다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또 무대공포증을 이겨내기 위해 웅변 기술을 끊임없이 연습합니다. 하지만 임관 후에도 처칠은 어느 곳에서도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종군기자의 역할’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이때 처칠은 자신이 역사에 강점을 보인 점을 살려 쓴기사와 책은 많은 대중들에게 관심을 받게 됩니다. 또 이렇게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린 처칠은 1899년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전쟁 포로가 되었다 탈출하며 다시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게 됩니다.

작가로서 전쟁영웅으로서 큰 인기를 얻게 된 처칠. 25세의 나이에 보수당 하원의원에 당선되게되고, 이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자유당과 보수당을 오가며 통상장관, 해군장관, 재무 장관 등을 역임합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후, 독일의 군사력이 영국 안전을 위협할 것이라고 발언했던 처질은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전쟁터가 된 유럽에서 처칠은 진실 되고 화려한 언변으로 영국 국민들을 단합시키고 전장의 병사들을 단결시켜 독일군의 침공을 막아냈습니다. 또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스탈린의 소련에 맞서 반소 진영의 선두에 서기도 했죠. 그렇게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처칠은 6년 동안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제 2차 세계 대전’이라역사책을 저술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책이 종군 기자 시절 갈고 닦은 그의 글 솜씨와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묘사로 만들어진 만큼, 이로인 해 처칠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낙제생이었던 그가 영국의 총리가 돼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노벨문학상까지 탈 수 있게 된 원동력. 그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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