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심재민 / 디자인 이연선]

▶ 가이 포크스 (Guy Fawkes)
▶ 출생-사망 / 1570 ~ 1606
▶ 국적 / 영국
▶ 활동분야 / 종교

1605년 11월 5일 영국 국회의사당인 웨스트민스터 궁 지하에 화약을 설치했던 ‘화약 음모 사건(Gunpowder Plot)’의 가담자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속 가면으로 등장하기도 한 가이 포크스는 현재까지도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 신교 가정에서 태어나 가톨릭으로의 개종
가이 포크스는 1570년 영국 요크 지역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이 포크스가 태어날 당시만 해도 그의 가정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신교(개신교)를 종교로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8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가 가톨릭 신자와 결혼하면서 가톨릭 가정환경이 만들어졌다. 이후 자연스럽게 가이 포크스는 가톨릭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가톨릭이라는 종교에 동화되어 갔다. 그렇게 점차 신교에서 멀어진 가이 포크스. 훗날 가이 포크스는 “16세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밝힌 바 있다.

- 가톨릭 사수하기 위한 신교도들과의 싸움
성인이 된 가이 포크스는 가톨릭 종교인답게 이탈리아식 ‘귀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 등 유럽국가에서 스페인군과 함께, 신교를 전파하려는 네덜란드 신교도들과 싸우기 위해 군인으로 활동했다. 그는 1603년에는 대위로 추천 받을 정도로 활약을 떨쳤는데, 특히 잉글랜드의 국교가 신교로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이교도를 물리치기도 했다. 하지만 잉글랜드의 국교를 다시 가톨릭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스페인 왕실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 가이 포크스를 찾아온 가톨릭 투쟁의 거물들
가이 포크스가 신교도와의 싸움이 한창이던 1604년. 그에게 잉글랜드에서 한 사람이 찾아왔다.그는 바로 훗날 세간을 뒤집어 놓은 ‘화약음모사건’의 주동자 토마스 원투어였다. 토마스 원투어는 신교도와의 싸움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가톨릭에 대한 신념이 투철한 가이 포크스를 눈여겨 보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 모종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가이 포크스를 스카웃하려는 목적으로 찾아 갔던 것. 토마스 원투어는 가이 포크스를 섭외해 곧장 로버트 케이츠비에게 소개해 주었다. 잉글랜드에서 가톨릭 세력의 부활을 위해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왕위를 제임스 1세의 딸에게 넘겨주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던 사람, 그가 바로 로버트 케이츠비이다.

- 향후 큰 테러의 중심인물로 나아간 가이 포크스  
의회 개원식에 맞춰 의사당을 폭파해 제임스 1세와 왕비 및 큰 아들, 대신/의원들까지 모두 한 번에 사라지게 하려는 케이츠비의 계획에 따라 가이 포크스와 그 조직은 단계적으로 움직였다.하지만 전염병 등의 이유로 몇 번 연기되기도 했었는데, 그럴수록 그들의 계획은 더욱 규모가 커져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가이 포크스는 점점 더 큰 역할을 맡아, 테러에 사용될 운반을 관리하고 심지어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까지 맡게 되었다.

- 변심한 조직원의 밀고로 수포로 돌아간 테러 계획
그렇게 점차 다가온 잉글랜드 의회 개원식 1605년 11월 5일. 그런데 가이 포크스 조직 중 한명이 변심을 하게 된다. 그리고 변심한 조직원은 의회 개원식에 참석할 몬트이글 경에게 “참석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버리고 말았다. 편지를 받은 몬트이글 경은 처음에는 ‘설마’ 했지만, 의회 개원식이 다가오자 점차 불안감이 커졌고, 결국 의회 개원식을 며칠 앞두고 왕에게 편지를 보이며 테러가 벌어질 수 있음을 고했다. 그길로 왕은 인력을 동원해 의사당 주변을 샅샅이 수색하게 했고 의회 개원식이 열리기 불과 몇 시간 전 성냥과 시계 등을 소지하고 있던 가이 포크스는 붙잡히고 말았다.

- 가혹한 고문에 꺾인 굳은 의지,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올라
감옥에 갇힌 가이 포크스에게는 곧장 배후를 추궁하기 위한 심문이 시작됐다. 하지만 가이 포크스는 자신을 ‘존 존슨’이라 주장하며 끝까지 실토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거사가 거행되지 못했음에 유감을 표했을 뿐이었다. 잉글랜드 왕실은 이에 격분해 ‘존 존슨’ 고문 명령을 내렸다.이후 가이 포크스는 극심한 고문에 그는 등이 휘고, 손조차 제대로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그리고 결국 고통스러운 고문에 이기지 못한 가이 포크스는 배후와 계획에 대해 실토했고, 곧 가이 포크스를 비롯해 가담자 모두 사살/처형 되었다.

1606년 1월 영국 의회는 가이 포크스의 테러로부터 왕이 무사한 것을 축하하고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11월 5일을 감사절로 정했다. 하지만 왕실의 의도와는 달리 이후 영국인들은 이 날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고 부르며 하나의 축제일로 여기기 시작했다. 가이 포크스가 하나의 저항 아이콘이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가이 포크스 데이 밤이면 그를 상징하는 인형을 들고 다니다가 불에 태우거나 그의 얼굴 형상을 딴 가면을 쓰는 등의 의식이 치러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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