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조재휘/디자인 이연선]

▶ 더글러스 맥아더 (Douglas MacArthur)
▶ 출생-사망 / 1880. 01. 26. ~ 1964. 04. 05.
▶ 국적 / 미국
▶ 활동분야 / 군사, 정치

제2차 세계대전 중 남서태평양 전역 사령관, 연합군 점령기에 전후의 일본을 통치했으며 6·25전쟁 초기 9개월 동안의 UN군 총사령관

- 맥아더의 초기 군 생활
맥아더는 육군 고위 장교가 된 아버지 아서 맥아더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친 어머니 메리 하디 맥아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웨스트포인트의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10년 동안 부관과 하급 부대 장교를 지내고 이어 4년을 일반참모로 복무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프랑스 전투 작전과 뒤이은 라인 지구 점령군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참모장,여단장, 사단장 등으로 직책을 바꾸어가며 활약했다. 필리핀에서 2차례 사령관직을 맡았으며 미국의 2개 군단을 통솔했다. 1930년 육군참모총장이 되면서 대장으로 승진했지만 1937년 미 육군에서 은퇴했다.

-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맥아더
일본군이 남중국의 주요 거점 항구를 점령하고 베트남 사이공에 대규모 병력을 주둔하며 남하하자 미국은 필리핀 방어를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1941년 7월 다시 현역으로 소환된 맥아더는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필리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전투를 수행했다.

1942년 3월 남서태평양 전역 연합군 사령관직을 맡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로 소환되었고 대일작전을 지휘했다. 그리고 일본군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작전을 세우지만,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항복했고 이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 UN군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임무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맥아더는 즉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일본에서 자신의 전용 비행기를 타고 한반도 정찰을 감행했으며 수원에 착륙한 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한강 이남의 정세를 직접 정찰했다. 그리고 부산 근방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한 후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하고 북한으로 진격하는 데 성공한다.

이때 북한군이 밀려나는 듯했으나 대규모 중공군의 공격으로 인해 맥아더가 이끄는 군은 서울 이남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2개월 후 맥아더는 부대들을 이끌고 공세를 전환해 북쪽으로 다시 진격했지만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이 상부의 명령을 거역하고 제한전(limited war)을 수행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사령관직에서 해임했다.

- 다시 고국으로 귀국한 맥아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미국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귀국한 맥아더는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를 받기도 했다. 1944, 1948, 1952년에 공화당의 보수 세력은 연이어 맥아더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따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964년 4월 5일 맥아더는 워싱턴 월터육군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맥아더는 인간적인 면에서 고압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비추어지지만, 우수한 지능과 통솔력에 의무, 명예, 조국을 위해 군인이 해야 할 도리를 다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이견이 따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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