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3년간의 유훈통치(遺訓統治)를 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하지만 발표와는 달리 사실상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을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으로 추대하여 사실상의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명목상의 국가원수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맡게 하되, 김정일 본인은 군사권을 장악한 국방위원장으로 실권을 행사하였다.

김정일은 폐쇄적인 정책을 고수했던 1990년대 동구권의 몰락을 목격하면서 나진, 선봉의 무역지구를 대폭 확대하고 개성직할시 내의 개성공단과 함경남도 원산 등의 무역항을 재정지하고 국외 상인들의 출입을 허용하는 등의 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사상적으로는 ‘주체사상의 최종적인 해석권은 수령과 그 계승자에게 있다’는 정치적 특권을 강조하여 국가지도자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북한의 현 제도를 이론적으로 확립시킨다.

김정일은 1997년 10월 조선로동당 총비서에 선출되어 1998년 1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과 평양에서 회담을 가진 후 1999년 1월초 신년사에서 새해를 '민족의 자주와 대단결의 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2000년 6월 15일 평양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갖게 된 후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은 분단 52년 동안 서로 대립하고 있었던 남북의 긴장을 완화하고, 남북 경제교류 활성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초가 되어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들이 동시 입장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98년부터 추진되었던 금강산 관광 사업도 원활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에는 10월 2일부터 10월 4일에 걸쳐 고(故)노무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과 두 번째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의 결과 남북간 신뢰 구축과 협력 강화 등의 목표를 담은 10·4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김정일은 2003년과 2009년 국방위원장에 다시 재추대 되었고 개헌을 하여 국가원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되었으나 2008년 뇌혈관 질환으로 쓰러진 뒤 위기감을 느껴 김정은을 '청년대장'으로 전면에 내세워 후계자 구도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2011년 12월 17일 8시 30분에 희천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경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건강이상설이 계속 나오던 시기에 이를 부인하기 위해 활동을 한 것이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렇게 북한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한 북한의 두 번째 지도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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