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김아련] 모리타 아키오는 이부카 마사루와 함께 세계적인 가전 업체 소니를 창업했다. 그 후 모리타 아키오는 언제 어디서나 음악을 듣고 싶다는 마음으로 1979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알려진 워크맨을 개발해 소니를 이끌었다. 워크맨의 성과는 엄청나 당시 패전의 절망에 빠진 일본 경제를 되살리고 ‘Made in Japan’으로 세계 전자산업을 주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60년대 말부터 2000년대까지 텔레비전, 컴퓨터 모니터, 워크맨, 콤팩트디스크(CD), 디지털 오디오 테이프, CD플레이어 디스크맨, 노트북 바이오,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이면서 전자제품 시장을 이끈, 소니의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의 비결을 살펴보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모리타 아키오

[사진/wikimedia제공]
[사진/wikimedia제공]

모리타 아키오는 1921년 나고야에서 300년 역사를 가진 양조장 집안의 장남으로 자랐다. 오랜 전통을 가졌던 집안의 양조장 사업을 물려받지 않고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해군장교로 복무하다가 소니의 공동 창업자인 이부카 마사루를 만나 1946년 도쿄 긴좌 뒷골목에 도쿄통신공업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소니의 모태가 되었던 ‘전파상’ 도쿄통신공업사는 계속해서 실패를 했다. 그러다가 노력 끝에 1955년 트랜지스터 라디오, 1960년 트랜지스터 TV, 1965년 비디오테이프를 제조하는데 성공해 ‘소니’라는 이름하에 사업의 발판의 다졌다. 아울러 당시 모리타 회장은 소니의 재정과 영업활동을 총괄하며 끊임없이 도전했고 미국으로 이주해 활발한 시장 개척에 힘썼다.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소니

[사진/wikipedia제공]
[사진/wikipedia제공]

미국으로 진출한 모리타 회장은 미군에서 주로 사용되던 트랜지스터를 일반 통신업에 접목시켰다.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1979년 소니는 20여 년 동안 연구해온 ‘작고 가벼운 라디오’로 불리는 ‘워크맨(Walkman)’을 출시했다.

워크맨은 이전 시장에 출시되었던 카세트테이프 기기와 달리 녹음 기능이 없는 재생 전용 기기였다. 재생에만 집중한 기기였기 때문에 제품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모든 기능을 재생에 집중해 당시 소형 기기로서 낼 수 없었던 고음질의 스테레오 음향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워크맨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후 1984년에는 워크맨의 휴대용 CD 플레이어 버전인 '디스크맨'을 출시해 막대한 매출을 올렸다. 그 외 소니 제품들은 일본에서 뿐만 아니라 캐나다, 호주, 네덜란드, 독일 등에 수출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국제적인 입지를 세운 기업인

이러한 실적으로 소니의 미국법인인 소니 아메리카 코퍼레이션이 설립되었고 소니는 뉴욕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 소니는 점차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 1988년 미국의 CBS음반사를 인수하고 이듬해 1989년 콜롬비아 픽처스를 인수해 종합 미디어사로 발전하게 되었다. 모리타 아키오는 소니를 ‘전자기기의 캐딜락’이라 알리며 서양에서 ‘메이드 인 재팬’의 입지를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런 그는 선구적인 기업인으로 인정받아 1971년 5월 미국 타임지의 표지에 실리기도 했다.

[사진/flickr제공]
[사진/flickr제공]

한 평생을 소니를 위해 바친 그는 1994년 테니스 운동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명예회장에서 물러났다. 그러다 하와이에서 요양을 하다가 1999년 8월 도쿄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다.

소니는 지난 20년간 휴대용 음향기기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수많은 경쟁업체에서 워크맨을 따라잡기 위해 제품을 선보였지만 소니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소니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되기까지 모리타 회장의 노력이 매우 컸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는 미 펜실베니아대 명예 법학박사, 프랑스 레지옹 드뇌르 훈위, 영국 기사 작위 등을 수상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기업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