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1970년을 전후하여 북한은 강경노선을 완화하고 경제건설과 대남 정책의 실패를 물어 빨치산세력 중 강경파를 숙청하고 실무형 관료와 혁명 2세대를 등장시켰다.

1972년 김일성 족벌체제가 출범한 가운데 안으로는 김일성의 권력을 무한대로 높이기 위해 ‘인민민주주의헌법’을 개정하여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남한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하여 내각 수상을 주석으로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과 입법, 사법의 모든 권력을 집중시켜 세계적으로 역사상 유례없는 절대권력을 구축하였다.

또한 새 헌법은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바꾸어 평양이 ‘민족의 심장부’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70년대의 북한 절대권력을 밑받침한 것은 김정일이었다. 그는 30세가 되던 1873년 9월, 당을 장악하고 1974년 2월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으로서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공인되어 ‘당중앙’으로 호칭되며 후계구도를 성립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1973년, 수만 명의 젊은 엘리트를 장악하여 1974년부터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구호가 나타나는 3대혁명 소조운동으로 김정일 세습체제를 대중 속에 심어두었다.

3대혁명 소조운동은 1973년 당의 핵심인사들과 청년 인텔리들로 구성된 작은 지도그룹을 공장과 기업소협동농장에 파견하여 사상과 기술, 문화의 세 분야에서 혁명을 지도하게 한 운동으로 주체사상을 대중 속에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정일의 세습 체제는 대중 속에 뿌리내리는데 성공하였지만 경제 정책은 그러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이어 1970년대 북한의 경제는 여전히 침체를 면치 못한 것이다.

71년부터 77년까지 이어졌던 6개년 계획과 78년부터 84년까지의 7개년 계획이 잇달아 추진되었지만 연평균 성장률이 2%를 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결과는 남한이 10% 내외의 고속성장을 이룩한 것과는 대조를 보였고 북한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많은 보완책을 내놓았지만 쉽지 않게 되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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