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김미양] 6·25전쟁을 거치면서 김일성과 노동당의 독재가 더욱 강화되었다.북한 정권이 처음 수립될 당시에는 당이나 내각에 계파가 다른 공산주의자들이 다양하게 존재했었다. 하지만 전쟁을 치르면서 김일성계를 제외한 다른 계파의 인물들이 차례로 제거되기 시작했다.

1950년 12월 연안파의 무정이 전쟁 기간 중 평양 사수 실패의 책임을 물어 숙청되었고1951년 11월 소련계의 대표적인 인물인 당 중앙위원회 비서 허가이가 전쟁기간 중 당 조직 운영의 실패를 이유로 비서직에서 해임됐다. 그는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한 1953년 3월 부수상이었던 박헌영, 당비서였던 이승엽, 이강국 등의 남로당 출신의 핵심 간부들이 반국가·반혁명 미국 스파이 혐의로 긴급 체포되어 대부분이 처형당했다. 이로써 조선로동당 내의 내부 분파는 대부분 몰락하게 되었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로당계 인사 10여 명이 사형선고를 받아 처형당했다. 박헌영은 1955년 연말에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이들이 쿠데타에 의해 세우려 했다고 알려진 정부의 요인은 다음과 같다.

수상에 박헌영, 부수상에 장시우, 주영하, 내무상에 박승원, 외상 이강국, 무력 김응빈, 선전상 조일명, 교육상 임화, 노동상 배철, 산업상 윤순원, 제1서기 이승엽이다. 하지만 이들이 실제로 쿠데타 음모를 계획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1956년 8월 전쟁이 끝난 후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스탈린 비판이 일어나자 조선독립동맹계열의 연안파 지도자 최창익과 소련계열의 내각 부수상 박창옥 등은 일인 권력화를 진행중이던 김일성 지도부를 공격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이른바 ‘반당종파’로 몰리며 당적을 박탈당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숙청과정을 통해 김일성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들을 제거하고 오늘날까지 대를 잇는 장기 독재 체제의 기반을 닦게 되었다.

※본 기사는 청소년들에게는 올바른 역사의식을 고취시키고 시선뉴스를 구독하는 구독자들에게 한국사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제작되는 기획기사입니다. 본 기사는 사실적인 정보만 제공하며 주관적이거나 아직 사실로 판명되지 않은 사건의 정보 등에 대해서는 작성하지 않는 것(혹은 해당 사실을 정확히 명시)을 원칙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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