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제국에서 활동한 벽안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대한 제국에서 활동한 벽안의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 [인포그래픽_세계인물편]
  • 보도본부 | 이연선 pro
  • 승인 2019.04.13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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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뉴스 이호 / 디자인 이연선]

▶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 (Ernest Thomas Bethell)
▶ 출생-사망 / 1872년 11월 03일 - 1909년 05월 01일
▶ 국적 / 영국
▶ 활동분야 / 언론

영국 출신의 신문기자로 대한 제국에서 활동하면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조선의 항일 운동에 불을 지핀 언론인.

- 특파원으로 대한 제국에 오다
1872년 영국의 브리스톨에서 태어난 어니스트 베델은 17살에 일본으로 건너와 15년 동안 고베에서 무역상으로 살아왔다. 그러다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한 달 뒤인 3월 10일 런던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 자격으로 대한제국으로 오게 되었다.

- 대한제국의 암담함을 보다
베델은 러일전쟁의 취재차 대한제국으로 왔지만 대한제국의 상황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1904년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고 1905년 11월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통감으로 부임시켜 내정 간섭을 했다.

대한제국은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 국가였지만 사실상 일본의 통치를 받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행정, 사법은 물론 언론까지 장악하여 모든 신문은 발행 이전에 검열을 거쳐야 하는 억압을 받고 있었다.

- 일제를 비판하는 신문을 발행하다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파원으로 온 베델은 곧 특파원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였다. 그 신문들은 바로 국한문 ‘대한매일신보’와 순한글 ‘대한매일신보’, 그리고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였다.

이 신문들은 한반도를 침략하려는 야욕을 보이는 일본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일제의 침략에 대해 격렬하게 규탄하였고 일제에 대항하는 의병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이는 일제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지만 영국인은 한국에서 치외법권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통감부는 이 신문들에 대한 검열과 압수를 할 수 없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함께 합병이 되었던 1910년까지 일본제국에 침략당하는 조선의 실상은 국내외로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에 일본제국은 영국에 압력을 가했고 베델은 1907년 10월과 1908년 6월 재판을 받아야 했다.베델은 결국 1908년 상하이로 호송되어 3주간의 금고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1908년 7월 경성으로 돌아와 사장직에서 내려와 활약하였다.

- 죽으면서도 한국에 대한 사랑을 보이다
베델은 타국이었던 한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쳐 활동하였지만 1909년, 36세라는 젊은 나이에 심장비대증으로 요절하게 되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양기탁의 손을 잡고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구 반대편에서 날아온 영국인 베델. 하지만 그의 한국 독립에 대한 열정은 그 어떤 한국 사람보다 더 뜨겁고 강렬했다. 그가 건강하게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한국의 독립도 더 빠르게 오지 않았을까. 안타깝고 고마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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