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박정희 정권은 1973년 6.23 선언을 함으로써 7.4공동성명의 정신은 퇴색하고 분단고착화를 위한 행보를 시작하였다. 6.23 선언은 평화통일을 위한 외교 정책 7개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 중 4항은 남북한의 국제기구 동시참여 불반대, 5항은 남북의 유엔 동시가입 및 동시초청 불반대, 7항은 우방과의 기존유대관계 공고화로 채우져 있다. 이는 이른바 독일식의 통일방안으로 그 핵심은 강대국의 이해와 국제정세의 현상유지를 위해 1민족 2국가로서 한반도를 유지하겠다는 의미였다. 이는 겉으로는 평화통일을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베트남 특수에 힘입어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인 수행으로 인기가 높아진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5월 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에 압승을 했다. 그리고 1967년 6월 치러진 제7대 총선에서는 공화당 129석, 신민당 45석, 대중당이 1석을 얻어 집권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이를 통해 여당은 개헌선을 확보하였으나 ‘고무신, 막걸리선거’로 불리는 뇌물 선거와 ‘관건선거’ 등 불법선거가 판을 쳤다. 야권은 총선에 무참히 패배한 후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어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63년 10월 15일 군정기관을 통해 권력기반을 확보한 5.16 주체들과 박정희 후보는 총 5명이 입후보한 대통령선거에서 총투표의 42.6%인 470만 2642표를 얻어 윤보선 후보보다 불과 15만 6028표 차이로 승리하게 된다. 이로써 박정희의 시대인 제3공화국(1963~1972)이 시작된 것이다.그리고 1963년 12월에는 제6대 총선이 치러졌다.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이 총투표의 32.4%를 얻어 대통령선거 때보다 더 낮은 득표율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석수에서는 전체 175개 의석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어부지리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자기들끼리 세력다툼을 하다 아무것도 못했던 무능했던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정권. 이 틈을 타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일단의 군부세력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장면 정권의 인수를 발표(1961.05.16.)하였다. 이들은 장면 정권의 인수,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회의 해산,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 금지, 국문위원과 정부위원 등의 체포를 밝히고 ‘군사혁명위원회’가 정권을 담당할 것을 선언하여 바야흐로 군정(軍政)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이나 미8군은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주역은 학생이었으므로 정권을 담당하는 능력은 없었다. 때문에 정치는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주도하는 형세가 되어 허정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허정 과도정부는 야당의 주장과 여론에 따라 내각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제3차 개헌을 실시(1960.06.15.) 하였다. 그리고 1960년 7월 29일 제5대 총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선거운동 양상이 민주당과 사회대중당 간의 치열한 대결로 압축 전개되었다. 하지만 승부는 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고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은 각 4석, 1석으로 5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48년, 노동자의 권리 등에 대한 별다른 법령이 없던 우리나라에 노동관계 법률이 제정되었다.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 “여자와 소년의 근로는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는 조항이 규정되었고 제18조에는 “근로자의 단결,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의 자유는 법률의 범위 내에서 보장된다.”고 규정되어 노동자의 사측에 대한 단체 행동이 법률 내에서 허가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노동관계법은 곧 발발하는 한국전쟁 때문에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1953년에는 노동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이승만 정부는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은 재조선 미군정청 법령에 의해 귀속된 일본인의 재산에 대하여 미군정청이 이미 행한 처분을 승인함”이라는 한·미 재정 및 재산에 관한 협정을 맺어 미군정의 귀속 재산 불하(매각) 방식을 인정하였다. 또한 재정안 정책의 일환으로 미군정시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광산이나 은행 등의 대기업에 대한 불하가 이루어 졌는데 문화재, 공공건물, 국방상 중요한 기업과 영구보존할 가치가 있는 건물 등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개인이나 법인에 매각하였다. 처리 방법은 부동산과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58년 12월 24일 이승만 정권은 무장경관 300명을 국회의사당 내에 출동시켜 야당들을 쫓아내고 신국가보안법과 지방자치법을 일괄 상정하여 통과시켜 버렸다(2·4 정치파동). 이 행위의 명분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북괴의 위장평화 공세에 능동적인 대처를 위함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정부 여당에 대한 비판과 언론통제가 골자였다. 그리고 1960년 3월 10일 민주당의 후보였던 조병옥이 선거 10일을 앞두고 지방에서 급사하여 이승만은 무투표로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당과 이를 추종하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52년 8월 5일 치러진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평화통일과 혁신노선을 내세운 조봉암 후보가 약 30%의 표를 얻으며 진보당을 결성하고 지방에서 지역당 조직을 확대하자 이승만 정권은 이에 큰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서울시 경찰국은 1958년 1월 9일 진보당이 북한과 결탁하여 정부전복을 기도하고 있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사건 인지보고’를 하여 1958년 5월 2일 민의원 총선거를 4개월 앞둔 1958년 1월 12일 조규희, 윤길중, 김달호, 이동화 등 진보당 간부들을 체포하고 이틀 후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54년 5월 20일 치러졌던 제3대 총선에서는 이승만의 자유당이 민주국민당을 눌렀지만 무소속 의원들의 비율이 여전히 높았다. 이에 1954년 직선으로 재선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안을 통과시켰다.(2차 개헌)개헌을 위해서는 재적의원 203명 중 3분의 2가 찬성을 해야 통과가 된다. 그런데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 되므로 136명이 찬성을 해야 하는데 이승만 정권은 소수점 이하는 한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이승만 정부는 친일파 청산과 농지 개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 민심으로부터 점점 멀어졌다. 이로 인해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무소속 의원들이 많이 당선되었고 한국전쟁 중에도 중대한 실정을 행했다.1951년 2월 10일 국군은 경남 거창에서 양민 500명을 공산군으로 오인하여 사살하였고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고급 장교들이 군수품을 빼돌려 압록강에서 수많은 국군 장병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거나 사망하기도 하였다.1951년 12월에는 전쟁 중 임시수도인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유엔군이 남한을 재수복 할 무렵, 미국의 비공식제의를 받아들인 소련은 유엔을 통해 휴전회담을 제의하였다(1951.06.23.). 이로 인해 유엔군과 북한군 및 중공군 사이에 휴전회담이 진행되었는데 군사분계선의 설정, 중립군 감시기구의 구성, 포로교환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난항을 거듭하여 2년여의 시간이 끌려왔다. 이렇게 시간이 끌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계속 진행되고 있어 남한과 북한, 쌍방 간의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첫 정전회담은 개성에서 1951년 7월에 열렸고 10월 판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이에 맞서 북한에서도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를 시행하고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한반도는 어렵게 일제에게 해방을 이루었지만 강요된 미소의 외압으로 인해 분단국가가 성립되고 말아버렸다. 남한은 이런 와중에 제주도 4.3 사건으로 인해 내륙 곳곳으로 흩어진 반란군을 처리하는 일과 이승만 정권의 2대 총선 패배 위기, 주한미군의 철수 등으로 극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또한 미국의 국무장관인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50년 3월 공포된 법으로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농가경제 자립과 농업생산력 증진으로 인한 농민생활의 향상 및 국민경제의 균형과 발전에 기여하기 위하여 제정된 법률이다.이 법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북한에서 농지를 무상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분배한 농지개혁에 대응하여 실시된 법률로 소유자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농토(소작인이 경작하는 농토)에 한하여 정부가 5년 연부보상(年賦補償)을 조건으로 소유자로부터 유상취득하여 농민에게 분배해 주고, 농민으로부터 5년 동안에 농산물로써 정부에 연부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제주도 4.3사건 진압을 위해 여수 주둔 국군 14연대에 출동 명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군인들이 군부대 내 좌익 세력을 중심으로 “동족을 학살하는 데 가담할 수 없다”, “제주도 출동 반대! 통일 정부 수립”등을 외치며 여수와 순천 일대를 무장 점령하여 반란군이 되었다.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일부 군인들은 무장반란을 일으켜 경찰과 많은 우익 인사들을 살해했다. 반란군은 여수를 점령한 후 순천, 광양, 곡성, 구례, 벌교, 고흥 등 전라남도 동부 5개 지방을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1948년 5월 10일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불참한 가운데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예정대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 선거 결과, 총 200석의 의석 가운데 이승만의 독촉국민회가 55석, 한민당이 29석을 얻었고 무소속이 85석을 차지하였다.2년 임기의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혼합한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국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으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유엔에서는 1947년 9월에 한국문제가 상정된 이래 미국과 소련 간의 공방이 오가다 본회의에서 소련의 양군 철수안이 부결되고 미국의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안이 가결되었다(1947.09.11). 이 결의에서는 한국의 총선을 감시하기 위한 유엔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고 선거에 의해 제헌국회를 구성한 후 90일 이내의 완전철병을 위해 이 국회가 점령국들과 협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좌우합작 운동을 주도하던 김규식은 세력을 규합하여 ‘민족자주연맹’(1947.12.20.)을 결성하여 좌우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대규모 민중항쟁의 봉기와 진압으로 좌익세력의 입지가 약화된 가운데, 중도 좌우세력을 중심으로 추진된 합작 운동은 간접선거로 당선된 민선과 관선으로 이루어진 ‘남조선입법의원’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1946. 12. 12) 중도 좌우세력 중심으로 추진된 좌우합작과는 달리 입법의원의 구성 결과는 민선에서 극우세력이 대거 당선되어 부정선거 의혹을 불러 일으켰고 온건 좌익의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사실상 극우와 중간 우익세력으로 구성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강경한 좌익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신탁통치의 찬성과 반대를 둘러싸고 양극화된 갈등 속에서 중도파 정치가들이 좌우합작을 통한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였고 좌우 온건파들도 여기에 가담하기 시작했다.이로 인해 1946년 5월 말 버치 중위의 주선으로 시작된 좌우합작 운동은 6월 30일 하지의 지지성명으로 적극화 되었고 1946년 7월 10일 좌우합작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우익 세력과 좌익 세력이 각각 5명의 합작 위원을 선발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된다.위원회는 1946년 10월 우파와 좌파 간에 이견이 심했던 토지문제와 친
[시선뉴스 이호/디자인 이정선] 정부 수립 운동이 난항을 겪고 있는 동안 서울에서는 수많은 정당이 결성되어 난립하는 양상을 보였다.1945년 10월 23일에는 조선호텔에서 각 정당 대표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되어 좌익과 우익을 망라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정치체제가 되는 것을 꾀했다. 특히 임시정부와 좌익을 끌어들이기 흡수, 포석하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결국 좌익은 협의회를 떠났고 임시정부는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 3·8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